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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미소

A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어느 가을날, 그는 B 노인과 함께 동네 목욕탕을 다녀오다가 할아버지의 느린 발걸음이 못마땅했던지 갑자기 속도를 내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A는 저만치서 힘들게 걸어오는 B 노인의 당황스런 표정을 보았다. 차마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어 자리에 멈춰서자 B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심술궂은 손자를 가볍게 타일렀다.

“좀 천천히 가자. 그렇게 서두르다 넘어질라….”

한참이 지나 A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할아버지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을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을 담담히 맞이하려던 B 노인은 조금씩 시들어가는 손자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여 종종 “네가 건강해진다면 내 너를 업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텐데….”라며 한탄하곤 했다. 그러나 A에게 있어 할아버지의 모습은 괜한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는 늙은이로 여겨질 뿐이었다.

얼마 후, 식사 중에 쓰러진 B 노인은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음을 직감하고 자리에 누운 채로 A를 애타게 찾았다. 중풍의 후유증으로 발음은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그는 A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A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꺼내려 애쓰던 노인의 눈길을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그날 밤, B 노인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A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노인의 시신은 이미 영안실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B 노인의 흔적도 조금씩 지워져가던 무렵, A는 꿈 속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어떤 잘못을 범하여 경찰에 출두한 상태였는데, B 노인이 나타나 A의 죄를 대신 받으려 했다. 결국 경찰에 입건된 노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A를 바라보다 석상으로 변해갔다. 목욕탕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A에게 보여주었던, 세상 모든 것을 품에 안은 듯한 미소만을 남긴 채….

1986년 6월의 어느 화창한 날, 2교시 수업이 끝나고 학교 운동장을 잠시 거닐던 중 본관 건물 쪽에서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음악소리 ? 영화 ‘금지된 장난’의 주제곡 ‘Romance’ ? 에 황급히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교재를 꺼내는 사이 담임선생님이 도착했고, 잠시 후 3교시 ‘즐거운 생활’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동요 두 곡을 불러보겠다고 수업 개요를 설명한 뒤 교탁 옆 오르간에 앉았다. 우리는 한 소절씩 따라 부르며 동요를 배웠는데, 첫 곡은 ‘대한의 아들’ 이었다. 애국심을 기르자는 내용이겠거니 하며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다 2절에 이르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가 부르기엔 표현이 너무 거칠지 않은가?’ 이전에 접했던 동요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동요보다는 차라리 군가에 가까운, 어린이의 정서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곡이었다.

총칼로 육체무장 단단히 하고
내나라 금수강산 지켜 나가자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자유와 평화는 우리 것이다

수업시간이 반쯤 경과되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다른 동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6월 25일이 가까워질 때마다 종종 들었던 곡이었고 익숙한 멜로디였기에 따라 부르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에게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오후 5시만 되면 어김없이 국민의례 사이렌이 울리고, 민방위 훈련이 대규모로 펼쳐지던 그 시절, 여름날의 ‘즐거운 생활’ 수업은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낡은 책꽂이 하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오니 낯선 책꽂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소 투박하지만 튼튼하게 잘 짜여진 책꽂이는 만들어진지 오래 지난듯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배어든 모습이었다. 마치 새로 들어온 가구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언젠가 온 집안에 진동하던 못 박는 소리를 떠올렸다.

온 가족이 저마다 활기차게 살아가던, 생활에 필요한 뭔가를 뚝딱 만들어내는 모습이 익숙하던 그때… 당시만 해도 볼품없어 보이던 책꽂이는 어느덧 그 좋았던 나날들을 회상하게 해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어떤 타입인가요?"

“OOO씨, 들어오세요.”

토요일 오전 10시, 간호사의 호명을 듣고 들어선 K 병원의 어느 진료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앉은, 지난 10여년 동안 반복되었던 일상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의사는 마우스 휠을 굴리면서 1987년 이후의 모든 진료기록을 빠르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모니터와 마우스를 바라보다가 그는 내게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혹시 유전자 검사는 해보셨나요?”

예쁜 딸을 남겨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 혈액검사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것이 유전자 검사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기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어떤 타입인지 아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니 대답을 도와주려는 듯 의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Duchenne 타입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경우에는 20세까지 생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거든요. 대개 20세 이전에 사망하게 됩니다.”

의사의 한마디를 들으니 지금은 희미해진 10여년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느 따스했던 봄날, 병원에서 주최하는 정기 모임에 참석했다가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 품에 기대어 비스듬한 자세로 앉았는데, 혼자서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만큼 병세가 심각해 보였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관절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옆에는 호흡곤란에 대비하기 위한 휴대용 호흡기가 놓여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옆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나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보호자와 함께 앉아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의 얼굴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지만, 눈동자를 돌리는 것 말고는 표정을 바꿀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그를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 나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설마….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다시 K 병원 진료실, 그 타입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대답을 하자 의사는 왼손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진단서 내용을 작성하는 손놀림은 가벼워 보였으나 의사의 필체는 지나치게 흘린 나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의사에게 뭔가를 물어보려 했지만 다음에 한번 더 오라는 말을 듣기까지 질문할 기회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럼 저는 어떤 타입인가요?”

10년전의 일기를 꺼내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날림으로 적은 필체가 눈에 거슬리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내용들도 보이네요.

당시에는 2년만에 장만한 486 PC로 게임을 즐기느라 바빴습니다. ‘리틀 빅 어드벤처’ 데모버전의 섬세한 그래픽에 놀라기도 했고,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캠페인 클리어에 열을 올리다가 시험공부 안한다고 혼나기도 했군요. 94년에 등장했던 ‘One Must Fall 2097′을 그때까지 붙잡고 있으면서 친구와 대전을 즐겼고, ‘메탈맥스 2′를 구하면서 슈퍼패미컴의 세계에 다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Windows 95 한글판이 발매되었지만 설치할 엄두가 나지 않아 Windows 3.1을 계속 쓰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도스용 게임이 많았기에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결정이군요.

처음으로 나만의 워크맨을 가진 것도 그 무렵입니다. 새것을 사기엔 돈이 모자라서 중고를 얻었는데, 음이 떨리는 현상이 발생해서 얼마 안가 수리해야 했습니다. 워크맨을 매일 학교에 가지고 다니면서 ‘머라이어 캐리 MTV 언플러그드 EP’와 ‘서태지 3집’, 라디오에서 녹음한 Mr. 2의 ‘하얀 겨울’ 등을 듣곤 했습니다. 당시 논란이 일었던 서태지 3집의 ‘내 피가 모자라’ 파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테이프를 뜯어서 반대로 감았던 것도 기록되어 있군요.

일본에 다녀온 한 친구에게 여신님 싱글즈 CD를 얻게된 과정도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습니다. 빌린 다음날 부클릿을 훼손하는 바람에 수습방안의 하나로 아예 CD를 구입하고 말았죠. 그래도 지금까지 잘 듣고 있으니 다행이긴 합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는데도 수많은 기억들이 스칩니다. 지금보다 더 활기찼고 재미가 가득했던 1995년, 그때로 잠시 돌아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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